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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7일 윤미향은 인스타그램에 생일 파티 사진을 올려 구설수에 오르고 사과도 했다.

 

그리고 12월 18일에 경기도 광주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보금자리 "나눔의 집" 비위 의혹 관련 수사에서 범죄 혐의만 11개가 드러났고 심지어 죽은 할머니의 유산까지 빼돌린 정황마져 있다는 기사가 났다.

 


위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딱히 비판하고 싶지도 않고 말을 아끼려고 한다.  물론 그들의 잘못이 없다는 것도 아니고 두둔할 생각이 아닌 말할 가치조차 못 느껴서가 이유이며 이 글을 쓴 목적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어볼 사람은 많아봐야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뿐일테니 그다지 큰 이슈가 될리는 없겠지만 여기 이들도 혀를 내두를 만한 연말이라 집 주변 배달 야식 시켜 먹고 방구석에 누워 엉덩이 벅벅 긁고 있을 사탄도 한 수 접을 놀라운 사건을 소개하려고 한다. - 반전 주의

 

 

조선위안부들의 참상 - 자유신문 1946.07.16.

 

위안부를 구출, 귀국한 부녀공제 권씨 현지보고 - 중앙신문 1946.07.18.

우선 위의 두신문 기사는 거의 같은 내용으로 둘을 한데 요약하면


일제의 탄압정책으로 위안부라는 미명 아래 일본군들의 싸움터로 끌려가서 온갖 유린과 혹사를 당한 우리동포 부녀들은 일본이 항복하고부터 생소한 타국에서 갈바를 몰라 홀벗다시피 참혹한 꼴로 갈팡질팡 방황하는 처지에 있다.

 
이 참혹한 광경을 보다 못해 상해 재류 유지인 공돈, 강대형, 권후원, 노주영, 임영호 등은 각각 사재 2억원 씩을 각출하여 한국부녀공제회를 설립하여 조선군정 청파견제단체 만국전후구제총서 등의 협력으로 작년 11월부터 12월까지 약 1천 2백 14명의 부녀자를 수용 보호하여 금년 4월까지 전부 귀국시켰다.

금번 6월 30일 인천상륙의 귀국선으로 돌아온 권후원씨는 상해의 노상에서 아편중독으로 신음하고 있는 동포환자 남녀 20여명을 구급 인솔하야 귀국과 동시에 미군정 당국에 일단 보호수속을 하여 두었으며

 

아직도 상해에 남아 있는 농락 여성 30-40여명이 중국인 창루 마굴에 억류되어 잔업을 계속하고 있음에도 이를 구출할 합법적 수단을 갖지 못해 유감이라고 한다.


1930년대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게된 일본은 조직적으로 일본군 위안부를 강제 동원했다. 1945년 일본은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후 항복하였고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동원되었던 위안부들은 나몰라라 버려졌다.

 

이들을 돕기 위해 한국부녀공제회가 조직되어 일본군 위안부 출신 여성들을 수용하고 이들이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이들을 국내로 이주 시키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있다니!! 누구들과는 참 비교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불현듯 머리속을 스쳤다.

 

이사람들 요즘 탈북 브로커처럼 돈 받고 데리고 오는거랑 비슷하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렇겠어? 그래서 검색을 해보았다.

 

공돈.

바로 한국부녀공제회를 설립한 사람의 이름이다. 한국부녀공제회를 설립한 사람은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만 해도 위안소를 직접 운영하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위안부를 공급하는 사업을 하던 사람이 더이상 사업을 할 수 없게 되자 되려 그들을 돕겠다며 한국부녀공제회를 설립하고 위안부를 보호하고 갱생하는 시설을 운영하여 상해의 유력자들, 각종 단체, 중국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수용인원을 수만명으로 부풀려서 예산을 집행했다는 정황까지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방 후 중국 상해지역 일본군 '위안부'의 집단 수용과 귀환]이라는 논문에 실려 있다.

 

 

전쟁 한 번 못해보고 무력하게 주권을 빼앗겨버린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나라의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고 유린 당했던 위안부들.

 

나라는 해방되어 주권을 되찾았어도 그들을 유린되도록 방조한 업자들에게 또 다시 휘둘리며 해방되지 못하고 돈벌이 수단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수많은 세월동안 위안부라는 평생 씻지 못할 주홍글씨만 가슴에 새겨진채 누구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일에 이용되고만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이들은 백발 노인이 되었고 그 수마저도 몇 남지 않았다. 이제 얼마지나지 않아 이들은 사람들 기억속에서 쓸쓸히 잊혀질 것이다. 

 

과연 이들에게 진정으로 걱정의 손길을 뻣어준 사람이 있긴 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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